원주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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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지당 선양관 소개

 

임윤지당 선양관

  • 위치 : 강원 원주시 단관길 53-1
  • 문의 : 033-737-4701
  • 이용시간 : 09:00~18:00 (점심시간 12:00~13:00)
  • 휴무일 :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 공휴일 다음날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성 성리학자로,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호는 윤지당(允摯堂)이다. 아버지는 함흥판관 임적(任適)이다.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9세부터 대성리학자인 오빠 임성주(任聖周)에게 『효경(孝經)』, 『열녀전(列女傳)』,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역(周易)』, 『중용(中庸)』 등의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학습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효성(孝誠)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교양과 부덕(婦德)을 쌓아 조금도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19세인 1739년(영조 15) 원주에 거주하는 선비 신광유(申光裕)와 혼인하였으나 8년 뒤에 남편과 사별하여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일생동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을 쌓아 나태하거나 방심하는 일이 없었던 임윤지당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맡아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으므로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하였다.

임윤지당 사후에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와 친정동생 임정주(任靖周)에 의해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가 간행되었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경전 연구와 성리설(性理說)에 관한 논설과 선유(先儒)에 대한 인물 논평으로,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와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
예악설(禮樂說)
,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人說)
등은 이이(李珥)에서 시작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정통 성리학을 계승하였다. 묘소 위치에 대하여 『평산신씨족보』에는 정지안면 무지곡 뒷산 경좌로 나타나 있고, 현재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로 추정되고 있다.
임윤지당 선양관
임윤지당은 어떤 분인가?
임윤지당 기념비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은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에 원주에서 살았던 여성 성리학자였다. 그녀는 일평생 유교(儒敎) 경전(經典)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우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원리를 체득하였고, 부단한 수양과 도덕적 실천으로 높은 인격을 완성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고 체득한 것을 훌륭한 문장으로 저술하여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임윤지당은 우리 역사가 낳은 위대한 여성 학자이며, 도덕 실천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인물로서, 당시의 봉건적 사회분위기에서 진보적인 여성론을 제기하였다. 즉 남녀는 비록 그 역할이 다르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은 하등의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여성도 교육과 수양을 통해 성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임윤지당은 여성들의 교육을 통한 실력 배양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그녀의 여성론은 서양 여성학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한국 여성운동가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임윤지당의 학문적 업적
임윤지당의 학문적 업적은 크게 유교 경전 연구, 성리학 연구, 중국역사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연구는 모두 임윤지당 문집인 『윤지당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유교 경전 연구로서 주목되는 것은 『대학』과 『중용』에 대한 「경의(經義)」 33조이다. 이것은 두 책의 난해한 부분을 쉽게 해설하고 자신의 독창적인 설명을 붙인 것이다.

성리학 연구로는
이기설(理氣說)
,
심성설(心性說)
,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
예악설(禮樂說)
,을 들 수 있다. 그녀의 이기설에 나타난 특징은 이기(理氣)의 불리성(不離性) 혹은 혼융성(混融性)에 대한 강조이다. 임윤지당의 심성설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을 계승한 것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을 부정한 것이다. 인물성동이론은 사람과 사물의 성품에 형식적인 차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근원적인 성품[성(性)]에 있어서는 그것이 같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이 다 그것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예악설은 대체로 『논어』의 예악설을 토대로 하였고, 특별히 실천적인 면을 매우 강조하였다.

임윤지당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많은 중국의 역대 위인, 학자, 호걸들에 대하여 신랄하고 대담한 인물 논평을 남겼다.

이와 같이 임윤지당의 학문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당시까지 축적되었던 조선 성리학의 높은 수준을 깊이 이해하였으며, 독창적이고 명쾌한 식견을 가지고 자기나름의 독특한 학문체계를 수립하였다.
원주와 임윤지당
임윤지당의 오빠 임성주(任聖周)의 『녹문집(鹿門集)』에 나타난 ‘봉천(蓬川) 구석(龜石)’
원주는 임윤지당이 평산 신씨댁으로 시집와서 평생을 살았던 곳이고, 그녀의 묘소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녀는 1739년(영조 15)19세의 나이로 원주에 시집와서 1793년(정조 17) 작고할 때까지 55년간 원주에서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마을은 ‘봉천(鳳川) 구석(龜石)’으로, 현재 원주시 봉산동 원주초등학교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윤지당의 시댁인 평산 신씨 댁은 원주의 대표적인 명문집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저술 가운데 중요한 것은 대부분 원주에서 집필되었다. 따라서 임윤지당은 원주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높은 학문과 도덕으로 원주 지역사회에 많은 감화를 주었고, 이 때문에 널리 칭송을 받았다.

임윤지당은 원주가 낳은 위인으로 원주 시민들의 자랑스러운 조상이다. 또 우리 여성사 상(女性史上) 제1의 인물이다. 강릉의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비교하여 못할 분이 아니다.

현대는 남녀평등의 시대이고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다. 여성사에서 임윤지당이 가지는 위치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퇴계나 율곡과 같은 존재이다. 원주시민들, 특히 여성들은 이 고장의 위대한 선각자요 대학자인 임윤지당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널리 선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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